메모장



로마서 7장 7~25절 로마서강해 (2)

 

제목: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성경: 로마서 7장 7~25절


한때 열정적으로 소위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그런 신앙생활을 이끌어간 성서 본문을 하나쯤 갖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저에게도 그런 본문이 있습니다. 소위 회심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된 10대 후반부터 가히 미친 듯이 신앙생활에 매달렸던 20대 초반까지 대략 6-7년 동안 저의 모든 생각을 지배했던 본문이 바로 오늘 읽은 로마서 7장, 특히 14절부터 25절의 본문입니다. 로마서 7장부터 8장에 이르는 성서의 본문을 이해하고 싶다는 열망이 결국 저를 신학공부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대체 로마서 7장에 무엇이 있기에 저는 그토록 그 본문의 해석에 매달렸던 것일까요?


바울의 로마서, 특히 로마서 7장과 8장의 본문은 (제 자신을 포함한) 그리스도인의 실존과 그리스도교적 현실관/세계관을 대변하는 가장 중요한 전망을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제 자신 안에서 해석 및 정리가 일단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지난 며칠 간 로마서를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어 나가면서 새삼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학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 현대인문학 전반의 견지에서 보건대, 바울은 정말 위대한 사상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가 왜 요즘 인문학의 핫이슈인지를 알기 위해선 역시 로마서 7장을 읽어야 합니다. 바울은 라캉(Jacques Lacan)보다 1900년 전에 이미 “주체의 분열”을 말했고, 프로이트(Sigmund Freud)보다 1800년 전에 이미 무의식적 욕망에 관해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헤겔(G. W. Friedrich Hegel)보다 1700년 전에 이미 변증법적 사유를 했던 인물입니다.


왜 학자들은 이 본문의 해석을 두고 논란을 벌여 온 것일까요? 본문을 읽어봐서 아시겠지만, 이 본문 안에서 묘사되고 있는 ‘나’는 자신 안에 들어온 (율법의) 계명을 통해 죄가 틈입한 탐욕적인 존재이고(8), 급기야 죄가 살아나서 죽음으로 이끌린 존재였습니다(10-12). 율법 자체는 선한 것이지만,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하려고, 죄가 그 선한 율법을 방편으로 ‘나’에게 죽음을 일으켰습니다.”(13). 일단 여기까지만 보면, 바울의 진술은 율법과 ‘나’를 대조시키고 있는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율법은 선한 것인데, ‘나’는 악한 존재라는 것이지요. 율법이 선한 이유는 바로 ‘나’로 하여금 내가 원하는 것을 하려는 의지가 있음에도 이를 행하지 않는 모순된 사실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입니다(13-16).


문제는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이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죄’라는 사실이며(17, 21), 더 나아가 이 ‘죄’와 ‘나’가 분리될 수 없다는 데서 발생합니다. 즉,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으며, 나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으며, 나는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지킬과 하이드처럼, 혹은 <파이트클럽>의 잭과 타일러처럼, 내 안에 존재하는 또다른 나로 인해 고통스러운(곤고한) 사람. 과연 바울이 말하는 이 ‘나’는 누구일까요? 바울 자신이라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도인 그가, 이런 이중적인 혹은 분열된 정체성을 가질 수 있을까요?


저는 이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나’가 일차적으로 저 자신의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제임스 던(James D. G. Dunn)의 『로마서 주석』(2003)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번역되어 출간된 그 책을 구입하여 읽으면서, 저는 그야말로 새로운 세계를 만났습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저를 괴롭혀 온 문제에 대한 답변을 던을 통해 얻을 수 있었고, 종래의 제가 만났던 그 모든 개혁주의/복음주의적 해석과 결별을 단행할 수 있었습니다. 던은 과감하게도 그리스도인이란 애초부터 분열적인 주체라는 확고하게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더 이상 내가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를 고민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던에 따른다면,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이 묘사하고 있는 ‘나’는 ‘아담의 시대와 그리스도의 시대 사이에 끼여 있는 종말론적 긴장 상태’를 살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지칭합니다.


그는 율법이 분열되어 있는 것과 동일하게 그리스도인 역시 분열된 존재라고 말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14-25절의 ‘나’에 관한 바울의 현재적 묘사 중 어떤 것도 바울에게 완전히 지나간 과거의 어떤 상태나 경험을 묘사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바울 자신의 현재 상황을 일차적으로 전제한, 모든 세대의 그리스도인의 실존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나’라는 것입니다. 던은 로마서 6-8장 전체에서 하나의 “변증법적 구조”를 보며, 이 구조 속에서 바울이 ‘이미 그리고 아직 아니’라는 종말론적 긴장의 실재와 심각성을 표현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던이 해석하는 바울의 그리스도인이란, 종말론적 모순을 체현하고 있는 존재로서 이미 분열된 주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던은 7장을 넘어 6-8장 전체가 그리스도인들이 처한 이러한 종말론적 모순의 현실을 변증법적으로 구조화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많은 보수적 학자들이 8장에서 묘사되는 성령 안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7장의 ‘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기 때문에, 던이 7장과 8장을 동일선상, 즉 ‘이미’와 ‘아직 아니’의 종말론적 긴장의 구조에서 파악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던은 8장에서 강렬한 직설법으로 서술되고 있는 미래의 구원에 대한 확신 자체가, 7장에서 묘사된 대로 신자가 현재 사로잡혀 있는 종말론적 모순을 해소해 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합니다. 저는 던의 주장과 그에 대한 학자들의 비판적인 견해를 최대한 꼼꼼히 따라 읽으면서, 던이 해석하는 바울이 복음주의자들이 그리고 있는 그 바울보다 신학적으로 훨씬 심도 있고, 주석학적으로 정교하며, 인식론적으로 발전된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경험한 실존적 현실과 로마서 본문을 가장 잘 연결시켜주고 있기 때문에 그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로마서의 바울은 신자가 여전히 처해 있는 인간의 현실적 상황, 즉 제 아무리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이 육신과 사망의 세상에 속한 일부라는 현실적 상황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바울의 가르침이 끊임없는 도덕적, 윤리적 패배에 대한 알리바이를 제공해주는 것으로 오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바울로서는 신자들이 죄에 대한 굴종을 정당하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여기리라고는 추호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바울이 말하는 죄, 그것을 우리는 무의식적 욕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의식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무의식까지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복음주의적 그리스도인들이 무의식적 욕망을 얼마만큼 인정할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제가 보기에 이 본문을 이해하고, 또한 그와 관련해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의식의 존재를 인정해야 합니다.


로마서 7장 14-25절의 본문으로 이 논의를 가져와 보면, 말해진(언표된) 주체 즉 담론 속에서 설정되는 주체로서 ‘나’, 곧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는 나”가 있습니다. 하지만 말하는 행위(언표 행위), 즉 행위 자체에서 설정되는 주체로서 ‘나’는 여전히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습니다(7:25). 후자의 ‘나’, 즉 욕망하는 무의식적 자아의 탄생으로 인한 주체의 분열은 이미 율법 자체의 분열에서부터 예고된 것입니다. 바울에 따른다면, 율법 자체가 이미 그 본질과 기능에 있어 각기 분열되어 있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율법은 선한 것이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만, 역설적이게도 실제 그 기능상 율법을 통해 죄가 살아나 우리를 사망에 이르게 하기 때문입니다.


던이 해석하는 바울에 따르자면, 율법의 분열이 곧 율법을 소유한 인간의 분열이기도 합니다. 분열 혹은 모순적인 것이 이미 율법 안에,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율법을 모르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존재에 내장되어 있습니다. 모순과 분열이 피할 수 없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순은 그 자체로 틀린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실상 모순적인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현실적인 것입니다. 이 모순의 현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할 때 쉽게 빠져드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신자의 정체성의 일관된 본질에 집착하는 복음주의적 신앙담론과 같은 것들입니다. 물론 진보적 신앙담론들이라 해서 그런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적어도 복음주의 신앙담론에서처럼 자기현전적이고 단일한 주체,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주체, 대상인식의 가능조건으로서 기능하는 자기의식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는 근대적 담론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복음주의적 신앙의 코기토는 그들이 꿈꾸는 상상적 자아의 허위의식을 담고 있을 뿐입니다. 로마서 7장, 그리고 뒤에 이어지는 8장은 어떤 특별한 본질적 상(象)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주체의 특징이 언어를 통해 대상화할 수 있는 주체와 그렇지 못한 주체로 분열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후자의 주체를 보다 윤리적으로 말하기 위해 이제 바울이 성령(의 법)을 도입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모순의 현실을 체현한 분열적 주체로 로마서 7장의 ‘나’를 이해할 때 그 의의는 무엇일까요? 사실 이 분열이 가능하기 위해선 어떻게 되었든 율법의 존재를 알아야하고, 그래서 그 율법으로 인해 자신의 무력함과 자신 안에서 활동하는 죄 즉, 무의식적 욕망을 인지하는 과정이 수반되어야만 합니다. 그 무의식적 자아에 관한 의식적 인지 없이는 주체의 분열 자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의식적으로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믿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중요한 과정은 이러한 의식적 인지를 통해 무의식적 자아의 욕망을 깨닫고, 자신 안에서 의식적 신앙과 무의식적 욕망 사이의 분열을, 그 모순적인 존재의 현실을 대면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한편, 주체의 모순을 인식하는 과정이 선행되지 않으면, 세계의 모순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주체의 모순을 인식하는 자만이 자신의 욕망과 정직하게 대면하고, 그 욕망을 뛰어넘어 보려고 하는 진정으로 윤리적인 주체가 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체의 모순(7장)을 타인과 세계로 확장시켜 세계의 모순(8장)을 인식할 수 있는 자만이 세계 안에서 투쟁을 실천하는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모순과 갈등에 관한 첨예한 인식 없이는 운동도 투쟁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모순을 인식하고 그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투쟁하는 주체만이 진정 깨어있는 주체입니다. 자기 안에 존재하는 타자성이든 자기 밖에 존재하는 타자성이든 그 어떤 타자성과의 대립과 투쟁 속에서 자신의 존재근거를 정립하는 ‘투쟁적인’ 주체만이 고통이나 불행의 변증법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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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NFM 2013/08/23 10:46 # 삭제 답글

    안녕하세요 로마서 7장에 대한 고민 가운데 검색을 통해 이 곳에 왔습니다.

    이 글을 보게 되기까지 과정을 어떻게 설명드려야 할지... ^^;

    컴퓨터를 공부하는 대학원생이고, 짐 월리스의 회심을 읽고 신앙의 새로운 차원을 알았고,

    계속 말씀에 대한 고민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평범한 학생입니다.

    주변에 좋은 분들이 많아서 은혜롭게 올려주신 이 글과 같은 비슷한 맥락의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명쾌하지는 않았는데

    나누어주신 이 글이 제게 많은 도움이 되어 글을 남깁니다. ^^

    귀한 글을 나누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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