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장



요한복음 18장 33-40절 요한복음강해(4)

 

제목: 진리이신 예수님

성경: 요한복음 18장 33-40절


수년 전에 미국 하버드 대학의 졸업식장에서 유명한 소련의 노벨상 수상작가인 알렉산더 솔제니친이 강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의 강연은 미국 언론사상 최대의 반응과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소련에서 추방당한 이 지식인을 따뜻하게 영접한 미국은, 이 사람에게서 미국에 대한 칭찬과 자부심을 확인하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자유를 억압한 소련이 나의 고향일 수가 없었듯, 자유의 남용으로 정의가 왜곡되고 부도덕이 만연한 이 미국 사회도 나의 고향은 될 수 없다”는 선언을 했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의 분노에 찬 비평에도 불구하고, 한 언론인은 그를 가리켜 “진리의 증언자요 20세기의 진정한 예언자”라고 평했습니다.


솔제니친이 소련에서 추방되기 직전, 그는 재판 석상에서 인간성을 부정하는 공산주의는 반드시 망한다고 예언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재판관의 물음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공산주의는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오”재판관은 다시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진리가 무엇이오?』그러나 소련의 재판관이 이 질문을 솔제니친에게 던지기 훨씬 전에, 빌라도라는 사람이 예수를 재판하는 자리에서 그와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본문 38절을 보십시오.“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오늘날처럼 거짓된 가치관과 거짓된 우상이 진리처럼 행세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이 질문은 다시금 중요한 가치를 지닙니다.


진리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리고 이 진리에 대한 우리들의 접근은 어떠해야 합니까? 일반적으로 진리는 거짓의 반대 개념인 “참”으로 이해되어집니다. 그러나 헬라어에서 이 진리라는 말은 단순한 사실 이상의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기혼자들의 절반 가량이 이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할때, 우리는 그 말을 사실이라고는 하지만 진리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참으로 행복하게 할 수 있는 혹은 우리를 정의롭게 할 수 있는 어떤 참된 사실입니다. 옛날부터 철학자들은 이 진리를 “최고의 선”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성도들에게 이 최고의 선은, 하나님의 뜻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주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케 하는 그 어떤 것을 진리라고 선포하십니다. 또 요한복음 14장 6절의 유명한 선언을 주목해 보십시오.“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여기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와의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인도하는 그 무엇이 진리라는 의미에서 예수님 자신을 진리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분만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로 오신 구주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인 요한복음 18장에서 다루어진 이 진리라는 명제는 특별하고도 구체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메시아요 왕이라는 사실에 진리의 초점이 맞추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은 일종의 논쟁으로 시작됩니다. 33절을 보십시오.“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官庭)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본문을 계속 읽어 보면, 주님은 빌라도의 이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하십니다. 37절을 보십시오.“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그러나 그분이 왕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은 정치적으로 유대 나라를 지배하는 왕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특정 시간이나 지역의 개념을 초월한 인류의 왕이요 영원의 왕이라는 의미입니다.“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라는 36절의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가진 가장 실존적인 문제가 있다면 “누가 나를 다스리는가? 무엇이 나를 다스리는가?”하는 것입니다. 하루하루의 삶 가운데서 우리는 이 질문과 끊임없이 싸우고 있습니다. 누가 당신을 다스리고 있습니까? 무엇이 당신을 다스리고 있습니까? 거짓이 다스리는 곳에는 거짓된 결과가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다스리실 때, 그분이 왕이 되어 내 인격과 내 사고와 내 의식과 내 삶을 통치하실 때, 그곳에는 용서와 구원과 참된 생명이 있습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 중 가장 중요했던 부분은“예수님이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왕이십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이 고백을 주님 앞에 드렸습니다. 즉, 그 당시는 황제 숭배가 강요되고 있어서“가이사가 주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하지 않는 자들은 죽음을 당하기도 했던 것입니다.제가 얼마 전에 터키를 여행하고 돌아왔습니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즉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지역을 여행했는데, 제 마음 가운데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일곱 교회가 위치했던 지역에 가 보면, 희랍이나 로마의 신을 숭배하던 신전의 자취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규모는 아덴(아테네)이나 희랍의 기타 지역들에 있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나게 큽니다. 반면에 대부분의 초대 교회의 흔적은, 희랍이나 로마의 거대한 신전 근처에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실제로 방문해 보면 그 실상을 생생하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버가모와 같은 지역에 가 보면, 산꼭대기 한가운데에 제우스의 신전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 신전의 규모는 너무도 어마어마해서 그 도시 전체를 압도할 정도입니다. 우리는 버가모 교회에 보낸 사도 요한의 편지에서 이런 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位)가 있는 데라”(계 2:13). 저는 이 말씀이 얼마나 실감나게 다가왔는지 모릅니다.


황제를 숭배하고 또 이러한 신들을 숭배하는 거대한 신전들의 밑에 자리잡고 있는 보잘것없고 작은 교회의 터전들, 그러나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시이저가 신이십니다. 제우스가 신이십니다”라는 강요된 고백에 승복하지 않고, 대신 “예수가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말은 간접적으로 시이저나 제우스가 주님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이 고백 때문에 생명을 버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통해서 경험한 용서와 자유와 풍성한 생명과 하늘나라에 대한 찬란한 비전 때문에, 목숨을 걸고서도 예수가 주님이시라는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고백은 이 하나의 고백 속에 집약되어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진리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가 나의 주님이요 생명이라는 사실, 예수만이 내 삶의 유일한 초점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재판하고 있는 재판장을 향해서 이 위대한 진리를 선포하십니다.“진리가 무엇이냐?”『내가 왕이다.』빌라도의 물음과 예수님의 대답에 대해 그 당시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이번 장에서는 진리에 접근하는 세 부류의 사람들의 태도를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법정의 주변에 있었던 유대인의 무리들, 그들에게 진리란 다수를 의미했습니다. 또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 내 삶을 좀 더 편하게 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진리였습니다. 본문 40절을 보십시오.“저희가 또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바라바를 놓아 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그날, 바로 이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찬송하며 그분을 환영하고 있습니다. 왜 그들은 나사렛 예수를 그렇게 열렬히 환영했을까요? 그들은 인간 예수에게서 정치적 메시야 상(像)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민족이 로마의 지배에서 해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우리는 좀더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상황은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어 갔습니다. 예수는 죄인으로 체포되어 법정에 서게 됩니다. 법정에 서 있는 예수를 바라보는 그 순간, 무리들은 예수를 아마 별 볼일 없는 인간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리들은 배신당한 것과 같은 심정으로 “강도 바라바를 놓으소서. 그리고 예수를 못박으소서”라고 외쳐댔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진리를 이용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생각한 진리의 대상이 자신들을 이롭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자 돌연히 진리의 핍박자로 변신한 것입니다.


당신은 빌라도의 법정에 있었던 유대인의 무리들만이 진리의 이용자라고 생각합니까? 당신 자신은 이러한 모습과 무관하다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자문해 보십시오. 당신의 교회 출석 동기는 무엇입니까? 주일 아침에 한 번쯤 나와서 좋은 이야기 듣고 가는 것, 그것이 내게 해롭지 않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교회에서 사람들을 사귀면서 따뜻한 인간적인 교제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까? 물론 그런 동기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 출석의 유일한 동기가 된다면, 당신은 조만간 이 진리 앞에서 떠나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들의 필요를 만족시켜 줄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을 때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 높이 외치던 유대인의 무리들과 같은 진리에 대한 접근 태도가 바로 당신 안에도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진리를 이용하고자 하는 동기로만 그것에 접근 한다면 말입니다.


빌라도는 우리 앞에 진리에서의 도피자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는 예수님이 진리의 사람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분에게 아무 죄가 없었다는 사실을 그 자신의 입술로 고백하고 있는 본문 38절을 보십시오.“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19장 4절에도 똑같은 고백이 나옵니다.“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다 하더라” 그런데 이상한 사실은, 예수의 무죄를 분명히 확신하고 있는 빌라도가 그분을 채찍질했다는 것입니다. 또 본문과 동일한 사건을 취급하고 있는 마태복음 27장을 보면, 빌라도가 물로 자기의 손을 씻으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마 27:24). 빌라도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그렇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왜 그는 이 사건에서 도피하려 했을까요? 사실 빌라도는 어느 정도 자기의 양심을 따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예수님을 변호하고 그분을 석방시킬 수 있는 기회를 모색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던 더 중요한 동기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즉, 민중들로부터 자기의 위치를 인정받음으로써 자기의 권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그를 지배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진리를 깨닫고 거기에 순종함으로써 변화된 삶을 사는 것보다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더 중요시했던 것입니다. 만일 나에게 진리보다 더 중요한 무엇이 있다면, 나 역시 빌라도처럼 어느날엔가는 진리의 도피자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가능성 앞에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묻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 당신에게 오늘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은“나는 길이요 진리요”라고 말씀하신 그 예수님을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분이라고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만난 그 순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너무나 고상하기에 지금까지 자신이 가치를 두고 추구해 왔던 그 모든 것들은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했던 바울 사도를 기억합니까? 다른 어느 것에도 비교할 수 없는 생명이요 영광이요 소망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발견으로 그 외의 것들은 모두 상대적인 것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오늘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진리라고 고백할 수 있겠는지요? 만일 당신이 진리를 추구하긴 하지만 물질이나 생활의 안정이나 삶의 편리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당신 역시 빌라도처럼 대야에 피 묻은 손을 씻으면서 “나는 예수의 사건과 상관이 없다”고 선언하는 진리에서의 도피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19장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에 아직도 그리스도를 포기하지 않고 그리스도 앞에 찾아나오는 제자들의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19장 26절 이하에 보면, 사도 요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26절). 대부분의 제자들이 십자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와 공범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십자가 밑에까지 찾아왔습니다. 이 말씀에서 사랑하는 제자는 바로 요한복음의 기자 사도 요한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27절을 보십시오.“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여기 십자가 밑에까지 찾아나와서 주님의 유언을 받들고 있는 사도 요한의 모습을 주목해 보십시오.


19장 38절에는 아리마대 요셉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 그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제자는 아닙니다. 그는 열두 제자 중에 끼어 있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만은 그 누구에 못지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에도 그분을 버릴 수 없었던 이 제자의 이야기를 들어 보십시오.“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隱諱)하더니... ”공개적으로 나타나면 유대인들이 자기를 체포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숨어 있을 수만은 없다는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십시오.“...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마침내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 앞에 등장합니다. 그 잘난 제자들이 침묵하고 있을 때, 이 무명의 제자가 등장해서 예수님의 시체를 요청합니다. 자기가 가진 무덤에 예수님의 시체를 안장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 그는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계속되는 메시지를 보면, 이번에는 니고데모의 얼굴이 등장합니다. 39절입니다.“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성경이 니고데모를 소개하면서 그 앞에 붙인 표현이 아주 인상적입니다.“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요한복음 3장에 보면 밤중에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왜 하필이면 밤에 찾아왔을까요? 유대인의 관리, 산헤드린의 관원이라는 자기의 신분과 위치 때문에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은 있어도 백주에 등장하기가 꺼려졌던 모양입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기도하는 것이 꺼려져서 혼자 슬쩍 기도를 처리해 버리는 어떤 사람처럼 혹은 성경을 가지고 다니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까봐 그렇게 하지 못하는 오늘날의 어떤 그리스도인들처럼, 니고데모는 예수님에 대한 소심한 접근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19장에서 그는 마침내 변신합니다. 40절을 보십시오.“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에도 그리스도를 포기할 수가 없었던 이 제자들, 그리스도를 자기의 주님으로 고백하고 또 그분과 자기의 삶을 동일시할 때 겪어야 할 그 많은 어려움이나 손실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자기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동기로 여기게 된 제자들의 변화된 모습을 주목해서 보십시오. 그들은 진리를 사랑했던 그리고 진리의 증언자가 되기를 소원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진리는 전파되었고, 그 결과로 세상은 지금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변화를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씨시(Assisi=성 프란체스코가 태어난 곳,이탈리아 중부)의 성자 프란시스의 위대한 회심도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프란시스는 청년 시절에 위대한 기사(騎士)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기사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사람이 드물었습니다. 그 나라의 가장 유명하고도 유망한 기사가 되기를 원했던 프란시스, 그는 유달리 전쟁놀이를 좋아하고 쾌락을 즐겼던 패기에 찬 젊은이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한밤중에 들려오는 신기하고도 이상한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너는 주를 따르겠느냐 아니면 종을 따르겠느냐?”이 낯선 목소리 앞에 그는 고민하기 시작합니다.『누가 주인입니까?』 잠시 후에 그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발견하게됩니다.『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라고?』


지금까지 자기의 꿈과 야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 왔던 프란시스는 홀연히 던져진 그 질문 때문에 삶에 대한 깊은 고뇌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날 이후로 프란시스는 지금까지 즐겨 왔던 그 모든 쾌락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친구들은 어느 날 갑자기 변하기 시작한 프란시스의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이 친구가 왜 이렇게 변했는가 하고 의아해 했습니다. 친구들은 프란시스를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할 생각으로, 그를 위해 큰 파티를 준비했습니다. 그 파티 순서에 일종의 연극 놀이가 있었는데, 친구들은 그 연극의 어릿광대 역을 프란시스에게 맡겼습니다. 처음에는 친구들과 어느 정도 어울리고 싶은 생각 때문에, 어릿광대의 역할을 하면서 그 연극을 같이 준비했습니다.


어느 날 프란시스가 친구들과 함께 연극 놀이를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같이 길을 걸어가고 있는 장면이었는데, 프란시스가 갑자기 멈춰섰습니다. 그는 지금까지의 자기 인생이 바로 연극과 같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역겨운 분노를 느끼게 된 것입니다. 한참을 가다가 프란시스가 없는 것을 발견한 친구들은 그를 찾아서 오던 길을 되돌아갔습니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모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기도하고 있는 프란시스의 모습이었습니다.“주님, 이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그는 소리치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프란시스를 일으켜 세우면서 놀려대기 시작합니다.『아무래도 이 친구, 애인이 생긴 모양이야. 프란시스, 너 요즘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고민 생긴 것 아니니? 애인과의 관계에서 말이야... .』옷을 털면서 일어난 프란시스는 친구들 앞에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맞았어. 나는 순결하고 고귀한 내 신부를 만났어. 나의 사랑, 나의 진리이신 주님을 만났단 말이야 그 순간부터 프란시스는 자기의 전 생애를 그리스도 앞에 드려, 진리의 전파자로서의 변화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는 오류로 가득찬 이 세상에서 연극과 같은 의미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인류를 향해서 아직도 이 기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오, 하나님.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심게 하소서”


우리 이웃들의 삶의 場을 보십시오. 본능대로 쾌락대로 움직이는 우리 주변 사람들의 삶은 어쩌면 프란시스가 발견한 것처럼 헛되고 헛된 연극일지 모릅니다. 마음에 없는 웃음을 웃고, 마음에 없는 맞장구를 치면서 살아가는 연극 말입니다. 자기를 만나러 찾아오신 그리스도 앞에 자기의 삶을 던져 버리고, 이제는 당신만이 나의 사랑이요 나의 진리라고 소리치던 프란시스. 오늘 당신은 그의 기도 앞에 당신의 말로 응답해야 합니다. 인생은 연극처럼 살아 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안타까운 단 한번의 삶입니다. 당신은 여생을 어떻게 살기 원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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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8장 28-40절 요한복음강해(4)

 

제목: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나라

성경: 요한복음 18장 28-40절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예수님께서 받으신 재판은 종교재판도 아니고 정치재판도 아닌 매우 특이하고 불합리한 재판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가야바의 법정에서 빌라도 법정으로 옮겼습니다.  그 때가 새벽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요. 우리 시간으로 하면 3-6시 사이입니다.  어떤 재판이기에 그토록 급하게 서둘렀을까요?  예수님께서 살인을 했습니까? 강도짓을 했습니까? 쿠데타를 일으켰습니까?  그들의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악의가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빌라도 법정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들어가지 않은 이유는 오늘 밤부터 유월절이 시작이 되는데 부정하면 유월절 잔치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모든 이방인들의 거처는 다 부정하여, 부정한 이방인의 거처로 들어가면 곧 부정을 타 그 부정이 일주일간 계속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유대인들의 관점이었고 빌라도의 관점에서 보면 정말 웃긴 일이었습니다.  빌라도와 유대인들의 거처를 비교하면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목욕문화, 화장문화를 비교해도 빌라도의 것이 월등히 나았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노련한 정치가답게 두말하지도 않고 공관 밖으로 나와 무리들 앞에 섰습니다.  도대체 어떤 죄를 지었기에 이런 꼭두새벽에 데리고 왔느냐는 겁니다.  정치적 관점에서 보느냐, 종교적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혐의는 달라지겠지만 빌라도가 봤을 때 예수님에게서 아무 혐의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살인이나 강도 혹은 국가 전복 등을 꾀한 중죄를 지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데리고 가서 너희의 법대로 재판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이 사람을 죽여야 하는데 자신들에게 그럴 권한이 없으니 로마법에 따라 사형시켜 달라는 했습니다. 30-3절 말씀을 봅니다.  “대답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 하니.” 유대인들은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행악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행악자란 “법률 위반 여부를 떠나 심성과 인격 자체가 사악하기 짝이 없는 인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아주 파렴치한 행악자로 몰아갔지만 빌라도는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문제라는 것을 알고 종교법대로 예수님을 재판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빌라도는 그런 문제에 개입되기를 꺼려했습니다.  그러자 무리들은, 자기들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다며 버티었습니다. 


여러분! 그들에게는 과연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죽이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7장에 의하면 스데반 집사는 유대인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사도 바울이 하던 짓이란, 대제사장의 허락 하에 예수 믿는 자들을 돌로 쳐죽이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법에 의해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일 수 있었지만 죽일 권한이 없다고 강변했습니다.  로마법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빌라도가 미지근한 태도를 취하자 이제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의사를 거부한다면 이 사실을 로마에 알릴 것이고, 그러면 당신의 정치 생명은 끝날 것이다 라며 무언의 협박을 했습니다.  권력에 약했던 빌라도는 인간적 양심과 정치적 현실 사이에서 고심합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마음에도 없는 재판을 시작하면서 형식적으로 심문했습니다.


33-34절에,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무심코 질문을 던졌는데 예수님의 답변을 듣고 정신이 버쩍 들었습니다.  빌라도는 이 이상한 재판에서 빨리 벗어나려고 했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빌라도가 다시 질문합니다.  35절에,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님께서는 빌라도가 상상하지도 못할 대답을 하셨습니다.  36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고 헷갈렸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일 명분, 죄목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법으로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일 수 있었는데 왜 구태여 십자가 위에서 사형시키려고 했을까요?  그들의 의도된 계획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명기 21장 23절 말씀을 보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써 사후에라도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는 저주를 받아서 죽었다.”  낙인을 찍으려고 했습니다. 여러분! 누가 행악자입니까?  누가 저주받은 사람입니까?  누가 불의한 사람입니까?  유대인입니다. 


3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두 나라가 존재합니다.  이 세상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두 나라는 충돌하게 되어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특징을 잠시 살펴볼까요?  이 세상의 나라는 첫째) 영원하지 않습니다.  사람도, 인류도, 민족도, 역사도, 나라도, 문명도 일어섰다가 사라져갔습니다.  둘째) 사람이 통치합니다. 옛날에 왕이 통치했고, 지금은 독재자나 영웅이 통치합니다. 민주주의 국가라는 제도에서 대통령, 수상, 권력 기관이 통치합니다.  셋째) 자기 사랑입니다. 한 국가, 한 민족의 핵심 사상은 이기심입니다.  대한민국은 독도 문제로 일본과 대립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이라크, 북한 등도 모두 나름대로 명분을 갖고 있습니다. 그 명분의 핵심에 이기적 욕망이 들어 있습니다. 넷째) 권력 중심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가 이기게 돼 있는 게 이 세상 나라입니다.  또한 이 세상 나라는 정신적이지 않고 물질적입니다. 


그와 반대로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첫째는)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도 끝도 없고 멸망해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통치하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백성들을 보호하십니다.  셋째) 이타적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섬기는 자가 리더입니다.  넷째) 영적입니다. 두 나라의 세계는 너무나 다릅니다.  로마서 14장 17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누가복음 17장 20-21절에,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시제와 공간을 갖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적입니다.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서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수 있을까요?  요한복음 3장 3-5절에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재미있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헷갈렸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세계와 너무 다르고 상식에도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과 대화를 하면 할수록 헷갈렸습니다.  예수님께 다시 질문을 합니다.  37-38절에,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빌라도는 거듭나지 못했던 니고데모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니 할 수가 없었습니다.  빌라도의 관심은 예수님께서 어떤 죄를 지었는가? 짓지 않았는가? 였는데 아무리 찾아 봐도 죄가 없었기 때에 죄가 없는 사람을 사형시켜야 한다니 답답할 뿐이었습니다.  39-40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하니, 저희가 또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 빌리도는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에 죄수 한 명을 사면하는 전례를 생각해 냈습니다. 그걸 기회로 예수님을 심하게 때리고 풀어주면 자신의 양심도 편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제안합니다.  그런데 모여 있던 유대인들이 예수가 아니라 바라바를 풀어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바라바는 강도입니다. 자타가 인정하는 사형당해 마땅한 흉악범입니다.  유대 군중은 예수님 대신 바라바를 놓아주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결국 강도 바라바는 풀려나고,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사형을 당하시게 되었습니다.  빌라도는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유능한 사람이었지만 권력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빌라도의 최대의 실수였습니다.  역사는 그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불의와 맞서 싸우셨습니다.  인격이 유린당하고 불의에 짓밟혀도 꿋꿋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가 아니라 제자라고 한다면 1) 이 세상이 우리의 목적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2)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이어야 합니다. 3) 거짓이 아닌 진리를 쫓아야 합니다. 4) 고난과 불이익을 당한다 할지라도 부끄럼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이 세상은 목적지가 아니라 경유지란 사실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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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8장 12-27절 요한복음강해(4)

 

제목: 기도하지 않은 결과

성경: 요한복음 18장 12-27절


예수님께서 드디어 체포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 세 그룹의 사람들이 겟세마네동산에 찾아왔습니다.  첫째는 로마 군인들입니다. 둘째는 유대인들 즉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보낸 하속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유다 입니다.  그들은 등과 횃불과 병기로 무장한 채 예수님을 잡으러 밤에 겟세마네동산을 찾아왔습니다.  제자들과 물리적인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흥분한 베드로는 순간적으로 칼을 빼어들어 말고의 오른쪽 귀를 잘라버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고의 귀를 다시 붙여주시면서 베드로에게 칼을 집에 꽂으라고 하시면서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본문을 살펴보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결박당하시고 심문 받으시는 예수님입니다. 12-14절에,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 권고하던 자러라.”  예수님께서는 두 곳에서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첫째는 종교재판입니다. 둘째는 법정재판입니다.  정석대로 한다면 종교 재판을 받지 않고 로마 법정으로 끌려가셔야 했습니다.  산헤드린공회 법규에 의하면 해가 뜨기 전에는 회원들을 소집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안나스는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이용해 불법으로 비공식회의 갖고 예수님의 죄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아무리 심문을 해도 죄를 찾을 수 없게 되자 최후의 카드를 꺼내듭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너가 메시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그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안나스는 “너희가 참란한 말을 들었도다.”라고 하면서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를 보면 심하게 고난을 당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19-21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  다시 심문 받는 장면으로 갑니다.  대제사장 안나스가 예수님을 심문합니다.  무엇을 가르쳤느냐고 추궁합니다.  답변을 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당당함과 자유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의 공격에도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전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나스에게 말하기를 “모든 것을 공개적으로 가르치고 은밀히 한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 내가 가르친 것을 알고 싶으면 그때 들은 사람들을 불러다가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안나스는 예수님의 당당한 태도를 보면서 더 열 받았습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당당한 사람들을 싫어합니다.  머리를 숙이고, 손을 비벼대며 아첨하고 비굴한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전혀 그러시지 않으니까? 싫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2절에,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 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그들은 옳고 그름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태도가 건방지다고 하여 주먹을 날렸습니다.  이게 바로 인간의 나라입니다.  오만방자하기 이를 때 없습니다.  감히 하나님을 치다니...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2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권력, 폭력, 돈 앞에 흔들리지 않으시고 어떤 경우에도 교만하시지 않았습니다.  힘이 있으셨지만 힘을 사용하시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흔들림이 없고 교만하지 않습니다.  1) 우리는 돈이 없어 불행한 것이 아니라 자꾸 흔들려서 불행한 것입니다.  2) 집이 없어 불행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공포와 불안에 떨어서 불행한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 더욱 불행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면 당당해 지는 것입니다.  과감하게 목숨을 버리고 순교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21장 18절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내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예수님처럼 당당했으면 좋겠습니다.


두 번째는, 도망치는 베드로입니다. 17절에,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베드로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엄청나게 큰소리를 쳤습니다.  1)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 2)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막 14:31) 3)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눅 22:33) 4)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요 13:37) 얼마나 자신에 찬 고백입니까? 그리고 예수님에게 위기가 닥치자 순간적으로 칼을 빼들어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시자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모습이 한 순간에 사그라져버렸습니다. 이것은 모든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가복음 14장 51-52절에,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오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누가복음 22장 54절에, “예수를 잡아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쌔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베드로는 붙잡혀 가시는 예수님을 멀찍이 따랐습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가자니 용기가 없고 도망하자니 양심에 찔려서 붙잡히지 않을 정도로 멀찍이 떨어져 따라 간 것입니다.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 간 이유는 겁을 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변을 보면 이런 분들이 많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데, 확실히 믿자니 자신이 없고 교회에 안 다니자니 벌 받을 것 같은 생각에 교회에 오긴 하지만 항상 늦게 와서 일찍 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설교만 듣고 그냥 돌아갑니다.  베드로와 같은 성향의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가는 베드로에 대해, 우리는 두 가지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베드로의 믿음이 인간적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어도 성령 받지 못하고 인간적이고 육적인 믿음을 갖고 있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그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합니다.  이성이나 경험에 근거한 믿음은 한두 번 잘 할 수 있지만, 고난이 오면 곧 피해 버립니다.  그런 현상은 봉사 활동을 통해 잘 나타납니다.  봉사는 성령을 받아야 꾸준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3절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누가 뭐라 해도 끝임 없이 봉사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지켜주시고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칭찬 받기 좋아하고 분위기를 타는 사람들은 인간적으로 봉사하다가 중간에 끝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는 기도해야 할 때 베드로는 기도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원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함께 겟세마네동산을 찾으셔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도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을 보면 꿀꿀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라고 깨우시면 그들은 또 잠을 잤습니다. 세 번이나 기도하라고 깨우셨지만 제자들은 계속 잠만 잤습니다.  예수님께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항상 깨어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과 너무나 대조적인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완전히 다릅니다.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은 어떤 위기가 찾아오고 태풍이 몰아쳐도 절대 흔들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문젯거리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것입니다.(아브라함, 느헤미야, 솔로몬)  분노는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푸는 것입니다.(요셉, 나아만, 엘리사)  여러분! 기도한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암에 걸린 사람이 낫고, 만사형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면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고난을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제자들이 기도하지 않으니까? 예수님께서 잡혀가시자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1) 충동적으로 칼을 휘두릅니다.  2) 위기가 오자 도망가 버렸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하나님을 믿거나, 기도하지 않으면 제자들과 똑같은 행동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깨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세 번 부인하는 베드로입니다. 15-16절, 17-18절, 25-26절 베드로가 부인하는 장면입니다.  믿음은 보통 때 드러나지 않습니다.  계곡물이 깨끗한지 깨끗하지 않은지를 알려면 들어가서 휘저어보면 압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려면 상황이 닥치면 그대로 드러납니다.  누군가 욕을 해 주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면 우리의 믿음이 인간적인 것인지 성령님에 의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 뺨을 내밀 것인지 아닌지로 알 수 있습니다.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주고, 오리를 같이 가자면 십리를 함께 해 주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창피하게도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아무 소용이 없게 된 것입니다.  기도해야 할 중요한 시기에 육적인 피곤함으로 기도하지 않고 잠만 잤기 때문에 십자가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진짜 향나무와 가짜 향나무의 차이가 언제 드러납니까? 도끼에 찍히는 순간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향나무는 찍힐수록 향기를 더욱 진동하지만, 가짜는 찍을수록 도끼의 날만 상하게 할뿐입니다. 겉모습은 똑같아 보일 수 있지만 찍히므로 비로소 진위가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생화와 조화의 차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진짜 꽃의 잎은 떨어지지만 인조 꽃잎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진짜 꽃은 벌이나 나비에게 기꺼이 자신의 꿀을 빼앗겨 주고 나누어주지만, 모조 꽃은 떨어지거나 빼앗길 것을 아예 소유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요즈음 조화를 얼마나 잘 만듭니까? 구별이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떨어짐과 빼앗김의 유무에 따라 생화와 조화 여부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는 자인가 아닌가는 평소에는 판가름 나지 않습니다. 오직 결정적인 때에 드러나는 법입니다.  내 건강이, 내 재물이, 내 생각이, 내 뜻이 찍히고 떨어지고 빼앗기고 부서지고 깨어져 나갈 때, 바로 그 순간에서 마저 우리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한다면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믿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바로 그 결정적일 때를 위해 결정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일 때,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믿음이 필요할 때에 비신앙적인 길을 걷는다면 우리는 아직까지 참된 신앙인 일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준비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십자가를 질 수 있고, 기도하는 사람이 순교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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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8장 1-11절 요한복음강해(4)

 

제목: 쓴잔을 마시라

성경: 요한복음 18장 1-11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앞에 두고 자신을 위해, 제자들을 위해,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셨습니다.  중보기도를 마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감람산으로 가셔서 마지막 기도를 하셨습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였습니다.  마지막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로 시작하셔서 기도로 생을 마치셨습니다.  이렇게 산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날 안타깝게도 대형교회에서 목회를 하시는 목사님들이 마구 넘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보고 분당우리교회 담임목사님이신 이찬수 목사님께서는 이제 내 차례가 아닌가 싶다고 하면서 경종을 울리기도 했습니다.  그 분들이 어떤 분들입니까?  한국교회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고, 훌륭한 분들입니다.  처음에는 소박하고 순수했는데 교회가 커지니까? 이름이 명성을 얻으니까? 자신도 모르게 참신한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반면에 한국교회의 역사를 보면, 끝까지 초심을 잃지 않고 사신 목사님들도 많습니다.  이성봉 목사님, 한경직 목사님, 옥한흠 목사님, “꼬방동네 사람들”이라는 영화로 유명한 민빈운동의 대부 허병섭 목사님 이 분들은 한 길을 끝까지 고집하신 분들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처럼 신앙의 선배님처럼 끝까지 순종하며 신앙을 지켜야 할 줄 믿습니다.  옆 사람에게 말합니다. “초심을 끝까지 고집합시다.”  본문을 살펴보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2-3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예수님께서는 대적자들에게 잡히시는 순간까지 기도하셨습니다.  이제 몇 분 후면 잡혀가시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태연하게 제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잡으려는 가룟유다와 유대교 당국자들의 모습은 얼마나 보기에 딱한지를 요한은 3절에서 대조적으로 잘 표현해놓았습니다.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예수님 한 분을 잡으려고 약 2백 명에 달하는 군대를 동원하고 심지어는 성전경비병들까지 동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내놓고 기다리고 계셨는데 대적자들은 혹시라도 놓칠까봐 군대에 횃불까지 준비했습니다.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까?  참된 영광을 구하면 자유해지지만 헛된 영광과 자기 영광을 구하면 사람이 이렇게 모질게 변하고 몹쓸 모습으로 망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적자들에게 나타나서 말씀셨습니다.  “너희가 찾는 나사렛 예수가 바로 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놀랬습니다.  6절에,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예수님의 자유하심과 권위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자유하고 죽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부단히 기도하시는 중에 하나님께서 이런 세계를 열어 주시기를 함께 소망합니다. 계속해서 8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제자들을 염려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영적인 상태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직은 십자가를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제자들은 기도가 더 필요했고, 성령을 체험해야만 고난을 견디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 잡혀가면 심문을 견디지 못하고 죽을 것이 뻔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피할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태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디가 아픈지, 어디가 미약한지,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아십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밀하게 체크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인도해주십니다. 10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베드로의 모습은 당시 제자들의 상태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상황을 인간적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진해서 십자가에 당신을 내어주고 계신 것인데 베드로는 어떻게든 자기 힘으로 그 상황을 뒤집어보려고 합니다.  베드로가 칼을 빼어 휘둘렀는데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가 잘렸습니다.  요한이 얼마나 세밀하고 꼼꼼한 사람인지 그 급박한 상황에서도 말고의 오른쪽 귀가 잘렸는지 왼쪽 귀가 잘렸는지 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베드로 타입입니까? 요한 타입입니까? 저는 평상시에는 거의 대부분 요한 타입인데 어쩌다 한번 열이 뻗치면 베드로처럼 성질이 나오는데 저 자신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가 됩니다.


어제 밤중에 이 본문을 묵상하는데 시몬 베드로가 칼을 들고 설치는 모습이 꼭 그때 내 모습 같아 보였습니다.  예수님을 위한다고 한 것이지만 그저 한 사람의 귀나 자르고 만 것처럼 제가 교회를 위한다고 분노하여서 이 혀를 칼처럼 날카롭게 휘두르면서 상대의 마음을 얼마나 상하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뉘우치며 저를 위한 기도, 그분을 위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질을 부리고 있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칼을 칼집에 꽂으라.” 성질 부려서 좋을 것이 없고, 고집 부려서 좋을 것이 없고, 이를 갈면서 애를 쓴다고 해서 안 될 일이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칼을 휘두르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의지해야만 예수님께서 마신 쓴 잔을 마실 수가 있습니다.  성숙한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제자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부인을 해도, 진리로 인도하셨습니다.  고기를 잡으러 가도 진리로 인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베드로를 변화시키셨습니다.  베드로가 고난의 쓴잔을 마실 수 있도록 진리로 인도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절망할 일이 있어도 절망하지 마시고 쓰러진 그 자리에서 다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 충만을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반드시 도와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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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17장 20~26절 요한복음강해(4)

 

제목: 너는 누구를 부르는가

성경: 요한복음17장 20~26절


예수께서는 요한복음17장 20절에서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서만 비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빕니다"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이들에 대하여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 나는 그 사람들을 마지막 날에 살릴 것이다."(6:44)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리심을 받은 분이라면 기뻐하십시오, 주께서 하신 말씀은 그가 친히 부르신 제자들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부르시는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모든 사람들에게도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선택에 관한 논쟁은 교회사 속에서 풀리지 않는 숙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들의 주장이 어떠하던지 간에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적 주권과 인간의 책임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발생되는 문제는 서로의 엇갈린 주장으로 인하여 교회가 분열하고 반목하는 것은 잘못된 처사가 분명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사단의 훼방입니다. 이러한 논쟁은 오직 말씀 안에서 그의 지혜와 지식의 깨달음으로 곧 모든 사람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을 위하여 기도하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가 되기를 기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17:1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세상 가운데로 보내는 이유에 대하여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으로 보냈습니다."(17:18) 하시며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그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17:19) 말씀하심으로 진리와 거룩하심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밝히셨습니다. 이제 모든 교회의 성도들은 자신들이 맹종하던 교회의 목사들의 무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고, 그들을 잘못 가르친 목사들은 자신들의 한 일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을 져야할 때가 올 것입니다. 아직 확실치 못한 부분에 대한 것은 우리는 양쪽의 모든 논리를 가르쳐야 합니다. 한쪽의 주장만을 옳다하고 판단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오직 판단은 주께서 하실 것이고 우리에게는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있음을 믿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태복음 22장 14절의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는 말씀을 들어 오직 자신의 택함을 강조하기도 합니다만, 베드로 사도는 "오직 너희에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벧후3:9)고 진술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는다"(요한 3:16) 말씀하셨고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또 내게로 오는 사람은, 내가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요6:37)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에는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은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을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17:9)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이유에 대하여 "나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 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17:11)라고 밝히셨습니다. 또 주님은 "내가 그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서 보호하였습니다." 말씀하심으로 예수님의 사역은 아버지의 이름 가운데 있었음을 증명하셨습니다. 또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그들 가운데서는 한 사람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 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입니다"(요17:12) 말씀하심으로 그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기도는 장래를 향한 비젼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제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돌아가시고 그의 제자들은 남아서 주께서 오실 때까지 그의 사역을 완성하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 제자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께서 갖고 계신 창세 전의 영광에 대해서입니다. 주님은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도, 내가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합니다"(17:24)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제자들의 기쁨을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17:13). 주님은 또 세상에 남아 있을 제자들의 존재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주께서는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기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는 악한 세상에서 그들을 데려 가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악한 세상에 그들이 동화되지 않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지금 세상 가운데서 교회들이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대형교회의 비리들과 각 기도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무지몽매의 비리들이 메스콤을 통하여 질타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의 초점은 리더들로부터 시작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가롯 유다에 대하여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라"기록되었습니다. 가롯 유다의 행실이 그러했다면, 오늘날 악에 휘말려 멸망의 길로 달음질치는 그들도 이미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이미 "저희를 진리로 거룩히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악에 빠지면 주께서 하신 일이 모두 무의미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의 악에서 지키는 것은 진리로 거룩하게 되는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진리로 거룩하게 되는 길은 무엇을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이미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인격체이지만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예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의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알리신다 하셨습니다.(요16:13,14). 따라서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은 성경의 말씀 속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악에서 우리 자신을 보전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최종적 기도는 우리를 향한 사랑으로 이어집니다.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17:25,26) 하셨습니다. 문맥을 따라 이 말씀을 다시 종합하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거룩하게 된 제자들로 세상에 아버지의 이름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삼 강조하신 아버지의 이름이 무엇인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그의 이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직함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야훼(Yahweh)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야훼와 화합된 이름으로 '여호와 쉐와'(Jehovah Shewa)의 준말입니다. 'Shewa'의 의미는 구원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어의 'Yeshua'는 'Yahweh Shewa'의 준말입니다. 우리는 이 이름을 기억하여야 하며 우리의 삶 가운데서 그 이름을 지켜야 합니다. 아니 그의 이름 가운데 우리의 삶을 이끌고 가야합니다.


당신은 휴혹을 당할 때 그의 이름을 부르신 일이 있으십니까? 고통 중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신 일이 있으십니까? 위험 중에서 그를 부르신 일이 있습니까? 그 이름 속으로 피신을 하신 일이 있습니까? 나는 그에게 달려 간 일이 너무 많습니다. 시편을 보면 다윗이 얼마나 여호와 하나님을 찾았는지 우리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죽음의 늪에서 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쁨 속에서 그 이름을 찬양하였습니다. 나는 오늘 이 분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나의 당하는 환난에서 능히 구원하실 오직 나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릅니다. 예수께서는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7:11)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여 지켰다"(17:12)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의 이름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영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나 우리는 그의 진리의 말씀으로 거룩하여 집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은 그의 이름을 통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는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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